이전 5편에서는 수에즈 위기를 거치며 아랍 세계의 절대적 영웅으로 떠오른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과, 중동 전역을 휩쓴 아랍 민족주의 열풍을 다루었습니다. 강대국에 맞서 이겨냈다는 아랍권의 자신감은 하늘을찔렀지만, 바로 그 과도한 자신감과 정세 오판이 불과 10여 년 만에 인류 역사상 가장 전격적이고 결정적인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6편에서는 단 6일(1967년 6월 5일~10일) 만에 중동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다룹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오늘날 언론에서 끊임없이 보도되는 '점령지', '서안 지구', '가자 지구', '골란 고원' 문제의 직접적인 시작점이 바로 이 6일간의 전투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1. 일시적인 평화의 균열과 위기의 고조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 이웃국들 사이에는 UN 긴급군(UNEF)이 주둔하며 한동안 아슬아슬한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국경 지대의 긴장이 다시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갈등의 발화점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국경 충돌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등장: 1964년 PLO가 창설되고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파타(Fatah) 조직이 이스라엘 내부를 향해 게릴라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리아와의 갈등: 북부 국경에서 시리아 군이 골란 고원의 지리적 우위를 이용해 이스라엘 농경지에 포격을 가했고, 수자원 확보를 둘러싼 무력 충돌이 빈번해졌습니다.
소련의 오보와 나세르의 도박: 1967년 5월, 소련은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오보)를 이집트에 전달했습니다.
나세르는 아랍의 맹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UN 긴급군의 철수를 요구했고, 이스라엘의 경제적 젖줄이었던 아카바 만의 티란 해협을 전격 봉쇄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국제 해로 봉쇄는 명백한 전쟁 행위(Casus Belli)로 받아들여졌습니다.
2. 단 몇 시간 만에 갈린 승패: 이스라엘의 선제공격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군대를 집결시키자, 이스라엘 지도부는 국가적 존망의 위기를 느꼈습니다. 주변 아랍국들의 포위망이 완벽히 구축될 때까지 기다리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이스라엘은 극단적이고 치밀한 도박을 감행합니다.
1967년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 공군은 전격적인 선제공격 작전(포커스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지중해 상공으로 낮게 우회 비행하여 이집트 공군 기지들을 기습 타격했습니다. 이집트 조종사들이 아침 식사를 하거나 교대하는 틈을 타 레이더와 활주로를 먼저 파괴했고, 지상에 계류되어 있던 이집트 전투기들을 초토화했습니다.
단 몇 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의 80% 이상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공중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한 아랍 연합군은 지상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은 요르단과 시리아의 공군력까지 잇따라 괴멸시키며 하늘을 완벽히 통제했습니다.
3. 영토 3배 확장과 단 6일간의 대격변
제공권을 확보한 이스라엘 지상군은 세 방향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서쪽 (대 이집트): 시나이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 동쪽 기슭까지 진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자 지구도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 들어갔습니다.
동쪽 (대 요르단):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와 올드 시티를 포함한 동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2,000년 만에 통곡의 벽을 다시 되찾은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북쪽 (대 시리아): 치열한 고지전 끝에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천혜의 요새 골란 고원(Golan Heights)을 완전 점령했습니다.
6월 10일 휴전이 발효되었을 때, 이스라엘이 새롭게 지배하게 된 영토는 전쟁 전 원래 영토의 약 3배에 달했습니다. 단 6일 만에 일어난 이 압도적인 승리는 이스라엘에 엄청난 자만심을 안겨주었고, 아랍 세계에는 1948년 나크바를 넘어서는 굴욕과 절망을 남겼습니다.
4. 점령지 문제와 현대 중동 갈등의 고착화
6일 전쟁의 가장 큰 역사적 유산은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와 그곳에 살던 주민들, 즉 '점령지(Occupied Territories) 문제'의 시작입니다.
이 전쟁으로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다시 난민이 되어 요르단 등으로 쫓겨났으며,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남아있던 백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군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점령지 내에 유대인 정착촌(Settlements)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착촌 건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침해하고 장차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는 영토적 기반을 조각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오늘날까지 평화 협상을 가로막는 가장 결정적인 장애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국제연합은 1967년 11월, UN 안보리 결의안 제242호를 채택하여 "이스라엘은 전쟁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하고, 주변 아랍국들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라"는 일명 '땅과 평화의 교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 구상은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수십 년간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5.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이면과 교훈
6일 전쟁을 관찰할 때 단순히 이스라엘의 놀라운 군사적 전술에만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승리가 가져온 구조적 부작용도 함께 평가해야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입장에서 과도한 영토 확장은 장기적인 안보 부담이 되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적대적인 팔레스타인 인구를 내부 통제해야 하는 구조적 수렁에 빠졌으며, 군사적 압승이 가져다준 오만함은 불과 6년 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에서 치명적인 방심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둘째, 아랍권 내부에서는 나세르 중심의 범아랍 민족주의가 사실상 종말을 고했습니다. 아랍 국가들이 연대하여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으면서, 아랍 민족주의 대신 이슬람 근본주의 및 아랍 각국의 개별 국익 중심 외교가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3줄 핵심 요약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전격적인 선제공격으로 아랍 연합군의 공군력을 단 몇 시간 만에 괴멸시켰습니다.
단 6일간의 전투 결과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가자 지구,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 골란 고원을 점령하며 영토를 3배로 확장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점령지 통치와 유대인 정착촌 문제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동 분쟁의 핵심 구조가 되었습니다.
🔮 다음 편 예고
다음 7편에서는 석유가 세계 정세를 뒤흔든 사상 첫 번째 순간, ‘석유 파동과 제4차 중동전쟁(1973): 자원이 무기가 된 세계정세’를 다룹니다. 아랍권의 반격과 '오일 숏'이 가져온 글로벌 경제 충격을 다각도로 분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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