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년 7월 4일 오전, 팔레스타인 갈릴리의 메마른 언덕 위에서 십자군 왕국의 운명이 결정됐다. 장소는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두 개의 화산 봉우리 사이 분지. 그 이름처럼 십자군은 뿔 사이에 끼인 짐승처럼 포위됐고, 물 한 모금 없이 전날 밤을 버텨낸 기사들은 뜨거운 아침 햇살 아래 무너졌다.
한 남자의 등장 — 쿠르드족 소년, 술탄이 되다
살라딘, 본명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는 1138년경 현재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 출신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아랍인도 투르크인도 아닌 쿠르드족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도 흥미롭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아랍·투르크·쿠르드·페르시아계가 뒤섞인 복잡한 다민족 공동체였고, 살라딘은 그 경계를 종교의 이름으로 초월한 인물이었다.
1138년경 티크리트에서 태어난 그는 쿠르드족 군인 가문의 아들로, 아버지 나즘 앗딘 아이유브와 숙부 아사드 앗딘 시르쿠흐 모두 시리아의 젱기 왕조를 섬기는 장군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군영을 오가며 자란 그는 무기보다 쿠란과 아랍 시를 먼저 배운 사색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1169년 숙부 시르쿠흐가 사망하자 예상 밖으로 31세의 살라딘이 이집트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꼭두각시로 여겼지만 살라딘은 점진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1171년에는 200년간 이어진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폐지하고 수니파 아바스 칼리프의 권위를 복원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시리아로 진출했고, 이후 10여 년간 다마스쿠스, 알레포, 모술 등을 차례로 장악하며 이집트와 시리아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건설했다. 그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한 손에 모아 예루살렘을 향한 칼끝을 정렬시켰다.
불씨 — 르노 드 샤티용의 배신
전쟁은 하루아침에 터지지 않는다. 그 직전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어리석음이 있다. 1186년, 강경파 기독교 기사 르노 드 샤티용이 메카로 향하는 무슬림 대상을 공격하고 휴전 협정을 파기하자, 살라딘은 이를 명분으로 대규모 원정을 개시했다. 성지 순례길에서 무슬림 상인들을 습격한 이 사건은 십자군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지만, 르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살라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명확한 명분은 없었다.
한편 예루살렘 왕국 내부도 흔들리고 있었다. 1186년 뤼지냥의 기(Guy of Lusignan)가 즉위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의 긴장은 기를 지지하는 '궁정 파벌'과 트리폴리의 레몽 3세를 지지하는 '귀족 파벌' 사이의 분열로 고조되었다. 안에서는 내분, 밖에서는 살라딘의 군대 — 십자군은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상태로 전장을 맞이하게 된다.
하틴의 함정 — 물 없는 언덕에서의 결전
살라딘은 십자군을 세포리스에서 유인하기 위해 친히 일부 병력을 이끌고 북쪽의 티베리아스를 공격했다. 티베리아스는 공물을 바치고 공성전을 피하려 했으나 살라딘은 거부했고 7월 2일 도시를 함락시켰다.
미끼는 완벽했다. 이튿날 기와 레몽의 기독교 연합군은 티베리아스를 구하기 위해 세포리스를 출발했는데, 레몽이 선발대를 맡고 기는 본진을, 기사단은 후위를 맡았다. 살라딘은 기가 자신의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하고 주력 부대로 하여금 십자군의 진군로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끊었다.
거의 즉시 십자군은 무슬림 경기병의 공격에 시달렸다. 경기병들은 수원지 접근을 차단하고, 보급로를 끊었으며, 마른 덤불에 불을 질러 연기로 부대를 질식시켰다. 십자군은 한낮의 뙤약볕 속에서 끊임없이 위협받았고, 쉬거나 재편성할 기회조차 없이 지쳐갔다.
이튿날 아침, 결전이 벌어졌다. 7월 4일 아침 살라딘의 군대가 십자군을 포위했다. 마른 풀에 불을 질러 적을 혼란에 빠뜨린 살라딘의 궁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퍼부어 십자군 대열을 유린했다. 물을 빼앗기고 탈진한 십자군은 대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갈증에 시달리던 십자군 기사들은 제대로 된 전투조차 벌이지 못한 채 항복했다.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은 포로가 되었고, 르노 드 샤티용은 살라딘이 직접 처형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징적인 상실. 예루살렘 왕국의 기사들은 목마름과 열기 속에서 무너져 내렸고, 그들이 신성시하던 '신성한 십자가' 유물마저 적의 손에 떨어졌다. 십자군 왕국은 그날 하루, 전투력과 상징 모두를 잃었다.
예루살렘의 문이 열리다
9월 중순 살라딘은 아크레, 나블레스, 자파, 토론, 시돈, 베이루트, 아스칼론을 차례로 점령했다. 하틴의 패배로 병력을 잃은 예루살렘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예루살렘 공방전은 1187년 9월 20일에서 10월 2일 사이에 벌어졌고, 그 결과 예루살렘은 살라딘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로써 1차 십자군 전쟁 이래 88년간 기독교 세계의 수중에 있던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단순한 정복 서사와 달라진다.
승자의 방식 — 관용이라는 선택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수천 명을 학살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88년이 흘러 살라딘이 같은 도시를 되찾았을 때,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사실상 몸값 일부만 낸 사람도 풀어주었고, 몸값이 없는 노인이나 여인, 고아에게는 당장 필요한 돈까지 주며 예루살렘을 떠나게 했다. 이 모든 비용은 살라딘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왔으며, 어떤 약탈 행위도 금지했고, 떠나는 예루살렘인들을 지켜 안전한 곳으로 보내주었다.
살라딘은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고, 성묘교회를 계속 기독교인이 관리하는 것을 허용했다. 관대한 군주로 유명했던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무슬림의 지배 아래 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장면이 의미심장한 것은, 살라딘의 관용이 단순한 개인적 미덕이 아니라 정치적·종교적 선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인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은 서방 세계에 널리 전해져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았다. 적진인 유럽에서도 살라딘의 이름 앞에 존경을 붙이는 이가 생겨났다. 단테는 《신곡》 지옥편에서 살라딘을 이교도지만 덕성이 높아 지옥의 가장 편안한 장소에 배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살라딘에 대한 역사의 평가
하틴 전투와 살라딘의 예루살렘 탈환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으면 몇 가지 장면이 선명하게 겹쳐 보인다.
첫째로, 내부 분열이 외부의 패배를 만든다는 것. 살라딘이 뛰어난 전략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전략이 먹힌 이유는 예루살렘 왕국이 왕위 다툼과 귀족 파벌 싸움으로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노 드 샤티용의 독단적인 도발 하나가 왕국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역사 속에서 공동체가 무너질 때는 대체로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균열이 먼저였다.
둘째로, 승리 이후의 태도가 역사의 평가를 결정한다는 것. 하틴의 결정적 승리를 이끈 인물은 쿠르드족 출신의 술탄 살라딘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전장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승리 이후 보여준 태도에서 드러났다. 오늘날 살라딘의 이름이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중세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기억되는 이유다.
세상에는 전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있고, 역사에서 이기는 사람이 있다. 살라딘은 두 가지를 모두 해낸 드문 인물이었다. 그의 예루살렘 탈환 소식은 제3차 십자군을 촉발시켰고, 영국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신성로마제국의 군주들이 다시 성지로 집결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시간에.
이 글은 공개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세부 연대나 해석은 자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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