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 6일 밤,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 상공에서 한 대의 비행기가 미사일에 격추됐다.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고, 그 안에는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후투족이었다. 비행기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누군가는 이미 다음 행동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후 100일 동안 르완다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의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최소 50만 명, 대부분의 인권 단체 추산으로는 8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살해당했다. 르완다 정부는 훗날 그 수를 117만 4천 명으로 추정했는데, 이를 환산하면 하루 1만 명, 한 시간에 400명, 1분에 7명꼴이다. 총이 아니었다. 손에 잡히는 농기구와 마체테(날이 긴 정글도)로, 이웃이 이웃을, 때로는 가족이 가족을 죽였다.
신분증에 새겨진 운명
르완다에는 오래전부터 후투족과 투치족, 그리고 소수의 트와족이 함께 살았다. 인구 구성으로는 후투족이 약 85%, 투치족이 약 14%였다. 두 집단 사이에 크고 작은 긴장이 없진 않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수준의 격렬한 민족 증오는 오히려 식민 지배가 만들어낸 것에 가깝다는 시각이 많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르완다를 통치하게 된 벨기에는 1935년 부족이 표시된 신분증을 발행하고, 유목 부족인 소수 투치족을 지배계급으로, 농경 부족인 다수 후투족을 피지배계급으로 갈라놓았다. 이른바 '분할 통치'였다. 벨기에는 투치족이 키가 크고 덩치가 좋다는 신체적 특징을 이유로 이들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이른바 '하미틱 신화'를 적극 조장했으며, 교회가 세운 학교를 통해 투치족 자녀들을 엘리트로 육성했다. 식민지를 보다 쉽게 조종하기 위한 계산이었다.
그 후 독립(1962년) 이후에도 두 집단 간의 갈등은 지속됐다. 후투족이 다수결 논리로 정권을 잡자, 투치족 다수는 우간다 등 인근 국가로 피신해야 했다. 그렇게 타국에서 자란 투치족 망명자들이 결성한 조직이 바로 르완다 애국전선(RPF)이다. RPF는 1990년 르완다를 침공했고, 내전이 시작됐다. 1993년 아루샤 평화 협정으로 간신히 휴전이 이뤄졌지만, 이 합의는 후투족 강경파들에게 굴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994년 4월 6일 밤, 대통령의 비행기가 격추됐다. 누가 쐈는지는 지금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후투 극단주의자들이 평화 협정에 반발해 저질렀다는 설과, RPF 지도부가 배후라는 주장이 엇갈렸지만, 프랑스 검찰이 오랜 수사 끝에 증거 불충분으로 공소를 취하하면서 진상은 여전히 안개 속에 남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극단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한 행동의 신호탄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라디오가 살인을 방송했다
비행기 격추 직후, 수도 전역에 검문소가 설치됐다. 민병대원들은 모든 통행인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도록 요구했고, 신분증에 '투치족'이라고 적힌 사람은 즉석에서 처형됐다. 벨기에가 수십 년 전 만들어놓은 그 신분증이 이제 사형 선고장이 된 것이다.
학살을 부추긴 것은 총구만이 아니었다. RTLM이라는 라디오 방송이 하루 종일 살인을 독려하는 음악과 선동을 내보냈다. 이 방송사의 배후에는 후투 극단주의 재력가 펠리시앙 카부가가 있었다. 그는 도피 생활을 25년이나 이어가다 2020년 프랑스에서 체포됐다. 온건 후투족 총리 아가트 우윌링이이마나도 학살 첫날 살해됐고, 그녀를 경호하던 벨기에 유엔 평화유지군 병사 10명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벨기에는 자국 부대를 철수시켰고, 학살은 더욱 거침없이 진행됐다.
세상은 알고도 모른 척했다
이 대목에서 내가 가장 씁쓸하게 바라보는 부분이 있다. 세상은 몰라서 방관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 총사령관이었던 캐나다 출신의 로미오 달레르 중장은 학살이 시작되기 석 달 전인 1994년 1월, 후투 민병대에 대한 무기 공급 계획과 투치족 말살 음모를 담은 이른바 '제노사이드 팩스'를 유엔 본부에 보냈다. 유엔은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 학살이 시작되자 유엔은 병력을 철수시켜 현지에 270명만 남겨두었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라고 공식 명명하는 것조차 거부했으며, 르완다와 자국의 이해관계가 없다는 판단 아래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프리카단결기구 르완다 대학살 진상조사위원회는 훗날 이렇게 결론지었다. 미국, 프랑스, 유엔은 사태를 미리 막을 수 있었음에도 행동에 나서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결국 학살을 멈춘 것은 국제사회가 아니었다. RPF가 군사적으로 진격해 7월 4일 키갈리를 장악하면서 100일간의 지옥이 끝났다. 극단주의 후투 지도자들은 국외로 도주했고, 7월 19일 거국 통합 정부가 수립됐다. 후투계 파스퇴르 비지뭉구가 대통령, RPF를 이끈 투치족 폴 카가메가 부통령을 맡는 구도였다.
상처를 딛고, 그러나 아직도
학살이 남긴 숫자는 사망자 수만이 아니었다. 고아가 40만 명 생겼고, 난민 200만 명이 발생했다. 르완다인의 평균 기대 수명은 1993년 42.2세에서 1994년 14.1세로 폭락했다. 르완다 정부는 '가차차'라는 전통 마을 공동체 재판 제도를 되살려 죄질이 덜하거나 반성하는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을 지역 사회가 직접 결정하도록 했다. 유엔은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를 설치해 주요 전범들을 기소했다. 폴 카가메는 이후 대통령에 오르며 싱가포르, 한국 등의 사례를 참고해 경제 재건에 집중했고, 르완다는 서서히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를 표방하는 나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지금의 우리에게 여전히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르완다 대학살은 '미개한 아프리카의 부족 전쟁'이 아니었다. 식민 지배가 설계한 분열, 경제 위기가 쌓아올린 분노, 선동 미디어가 불 붙인 증오, 그리고 국제사회의 계산된 외면이 합쳐진 결과였다. 신분증 하나에 사람의 생사가 달렸고, 라디오 한 대가 이웃을 적으로 바꿔놓았다. 이 메커니즘은 오늘날 어느 사회에서도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것이 이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은 공개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세부 연대나 해석은 자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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