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쿠 다 가마, 후추 한 자루가 금값이던 시절 인도 항로를 열다

1497년 7월 8일, 리스본 항구에서 배 네 척이 조용히 닻을 올렸다. 선원은 약 170명. 목적지는 인도였다. 단, 동쪽으로 가는 육로가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남단을 빙 돌아 바다로 가는 길이었다. 이 항해를 이끈 사람이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약 1460~1524)다. 그가 열어젖힌 항로 하나가 중세 내내 수백 년을 지속해온 향신료 무역의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후추는 왜 그토록 비쌌나

오늘날 슈퍼마켓에서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후추 한 통을 떠올려 보자. 15~16세기 유럽에서 후추와 계피, 정향, 육두구 같은 향신료는 사실상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었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 향신료는 음식의 보존과 향미를 동시에 책임졌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당연히 수요는 넘쳤지만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문제는 유통 구조에 있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향신료는 아랍 상인들의 손을 거쳐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통과하고, 다시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영토를 지난 뒤, 최종적으로 베네치아 상인들의 손에 닿아야 유럽에 도달했다. 중간 단계마다 이윤이 붙었고, 소비자가 지불하는 가격은 원산지 가격의 수십 배에 달했다. 수세기 동안 이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베네치아는 이 독점 구조를 지키기 위해 해군까지 강화하며 타 세력의 접근을 차단했다.

포르투갈에게 이 상황은 기회로 보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왕국이 지중해 내륙 무역에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바다로,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로 직접 갈 수 있다면? 중간 상인을 완전히 건너뛸 수 있었다. 마누엘 1세(재위 1495~1521)는 이 꿈을 현실로 만들 인물로 바스쿠 다 가마를 낙점했다.

열 달의 바다, 그리고 캘리컷

항해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다 가마는 시에라리온 앞바다에서 아프리카 해안을 바짝 따라가는 대신 대서양 한복판으로 크게 우회하는 '볼타 두 마르(Volta do Mar)' 항법을 택했다. 남대서양의 강한 편서풍을 이용해 희망봉을 돌기 위한 전략이었다. 덕분에 항로는 브라질 근해까지 휘어졌다. 11월, 함대는 희망봉을 통과했고,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모잠비크와 몸바사를 지났다. 말린디(지금의 케냐)에서는 인도양 계절풍에 익숙한 현지 항해사를 구해 아라비아해를 건넜다. 이 항해사가 누구인지를 두고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어, 이슬람 항해자 이븐 마지드라는 설은 사료상 근거가 약하다는 평가가 지금은 대세다.

1498년 5월 20일, 함대는 인도 말라바르 해안의 캘리컷(지금의 코지코드)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리스본을 떠난 지 열 달 만이었다. 약 24,000마일(38,000킬로미터)을 항해한 끝이었다.

그러나 첫 만남은 기대와 달리 어색하고 굴욕적이었다. 캘리컷의 힌두 통치자 자모린(Zamorin)은 이미 아랍·페르시아·중국 상인들과 거래하는 거대한 무역 도시의 지배자였다. 다 가마가 예물로 내민 것은 줄무늬 천 몇 필과 꿀, 설탕, 산호 등이었는데, 궁정 관리들은 그것을 보고 비웃었다. 황금과 보석에 익숙한 자모린에게 포르투갈의 선물은 아프리카 해안 교역 수준에 불과했다. 게다가 캘리컷의 이슬람 상인들은 포르투갈의 등장을 노골적으로 경계하며 자모린에게 이들을 경계하도록 부추겼다. 결국 정식 통상조약 체결에 실패한 채, 소량의 향신료만 구입하고 3개월 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여정은 처참했다. 가는 길에 23일이었던 인도양 횡단이 오는 길에는 몬순을 역행하며 132일이나 걸렸고, 괴혈병이 선원들을 쓰러뜨렸다. 리스본을 출발했던 170여 명 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55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투자자들은 웃었다

인명 피해는 참혹했지만, 경제적 계산은 달랐다. 배에 실려온 향신료의 가치가 너무나 컸다. 다 가마의 귀환 후 투자자들에게는 투자 원금의 60배에 달하는 배당금이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항로가 작동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마누엘 1세는 다 가마에게 '인도양의 제독(Admiral of the Indian Seas)'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포르투갈은 즉각 후속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원했던 것은 단순한 무역 참여가 아니었다. 독점이었다. 1502년, 다 가마는 20척의 무장 함선을 이끌고 두 번째 항해에 나섰다. 이번에는 협상이 아니라 응징과 지배가 목적이었다. 그는 인도 해안으로 향하던 중 메카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수백 명의 이슬람 순례자들을 태운 상선 '미리(Miri)호'를 나포했다. 화물을 약탈한 뒤 배와 함께 승객 전원을 불태워 죽인 것으로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희생자는 300~400명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순수한 교역 원정이 공포 기반의 해상 지배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다.

포르투갈은 이후 인도양 항로를 오가는 모든 선박에 '카르타스(Cartaz)'라 불리는 통행 허가증을 구매하도록 강제했다. 허가증 없이 항해하다 적발되면 선박은 나포되거나 격침되었다. 이른바 '카레이라 체제'로 대표되는 포르투갈의 무역 방식은 군주의 계정으로 운영되는 국가 독점 시스템이었다. 인도양을 수백 년간 자유롭게 오가던 아랍·인도·동아프리카 상인들은 하루아침에 낯선 유럽 왕국에 통행료를 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베네치아는 무너졌는가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우리는 흔히 포르투갈의 인도 항로 개척이 곧 베네치아의 즉각적인 몰락을 불러왔다고 배운다. 그런데 역사는 조금 더 복잡하다. 베네치아의 국고 수입은 1500년 약 115만 두캇에서 1570년에는 200만 두캇으로 오히려 증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포르투갈이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완전히 봉쇄하지 못하는 틈을 타, 오스만 제국이 1516~1517년 시리아와 이집트를 장악하면서 기존 무역로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향신료 시장이 본격적으로 경쟁력을 잃은 것은 한 세기 뒤, 네덜란드가 향신료 산지인 동남아시아 몰루카 제도를 직접 점령하고 난 이후였다.

결국 포르투갈이 열어놓은 판을 가장 크게 활용한 것은 포르투갈 자신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왕실이 무역 이익을 독점하는 구조를 고수했지만, 네덜란드는 주식회사(VOC) 방식으로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훨씬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포르투갈이 뚫어놓은 항로 위에서 더 영리한 방식으로 이익을 가져간 셈이다.

바스쿠 다 가마라는 인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다 가마는 1524년 인도 총독 자격으로 세 번째 인도 항해에 나섰다가 코친(현재의 코치)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향년 약 64세였다. 유해는 처음 코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이후 포르투갈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포르투갈 입장에서 그는 국가를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영웅이다. 그러나 인도양 교역 공동체의 시각에서는 수백 년의 자율적 무역 질서를 무너뜨리고, 폭력으로 통행세를 강요한 침략자였다. 미리호 학살처럼 도저히 영웅의 서사에 끼워 넣기 어려운 사건들도 엄연히 기록에 남아 있다. 최근의 역사가들이 그를 '인도를 발견했다'는 표현 대신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직항 해로를 개척했다'는 표현으로 고쳐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도는 이미 번성한 문명과 촘촘한 무역망을 갖추고 있었고, 발견될 필요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바스쿠 다 가마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먼 바다를 항해한 탐험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항해는 어떤 항로가 열리는 순간, 그 항로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 무역의 규칙을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5세기 포르투갈의 희망봉 항로가 베네치아의 지중해 독점을 흔들었듯, 오늘날 해저 케이블이나 반도체 공급망처럼 새로운 '항로'를 먼저 쥔 자가 힘을 갖는다는 논리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 구조는 놀랍도록 자주 닮아 있다.

이 글은 공개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세부 연대나 해석은 자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