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9편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의 8년에 걸친 참혹한 소모전과 그로 인한 피로감을 다루었습니다. 8년간의 전쟁 끝에 이라크는 약 80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채무를 짊어지게 되었고, 경제는 완전히 파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이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 인접한 부국 쿠웨이트에 손을 벌렸습니다. 쿠웨이트가 대출금을 탕감해주지 않고 오일 생산량을 늘려 원유 가격을 떨어뜨리자,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해버렸습니다.
이 경솔한 오판은 결국 국제사회의 분노를 불렀고, 1991년 '걸프전(Gulf War)'이라는 대규모 국제적 군사 개입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현대전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놓은 걸프전의 과정과 이로 인해 시작된 미군의 중동 주둔,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심층 분석합니다.
1. 쿠웨이트 침공과 '사막의 방패' 작전
사담 후세인은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중동의 영토 분쟁에 직접 지상군을 보낼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세 흐름을 완전히 읽지 못한 치명적인 착각이었습니다.
쿠웨이트가 점령당하자 세계 최대 석유 매장 지대인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이라크의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만약 이라크가 사우디까지 위협한다면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40% 이상이 사담 후세인 손에 들어가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의 조지 H. W. 부시(부시 선조) 행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UN 안보리 결의안 채택: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와 함께 1991년 1월 15일까지 철수하지 않을 경우 "모든 필요한 수단(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다국적군 결성: 미국을 중심으로 아랍 국가(사우디, 이집트, Syria 등)를 포함한 35개국, 약 98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다국적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집결했습니다(작전명: 사막의 방패).
2. 하이테크 현대전의 시초: '사막의 폭풍' 작전
시한이 지나자 1991년 1월 17일, 다국적군은 이라크를 향해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습니다(작전명: 사막의 폭풍). 걸프전은 전 세계 시청자들이 안방 TV로 실시간 생중계를 통해 지켜본 최초의 '하이테크 첨단 현대전'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항공전과 스텔스 기술: F-117 스텔스 전투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레이저 유도 폭탄 등이 투입되어 이라크의 지휘 통제소, 방공망, 핵심 기반 시설을 정확하게 타격했습니다.
단 100시간 만에 끝난 지상전: 2월 24일 개시된 지상전은 단 100시간 만에 다국적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라크의 자랑이었던 공화국 수비대는 미군의 M1 에이브람스 탱크와 AH-64 아파치 헬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담 후세인 군대는 쿠웨이트의 유전에 불을 지르며 무성의하게 퇴각했고, 이라크는 무조건적 휴전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사우디 내 미군 주둔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분노
걸프전에서 미군과 다국적군이 이라크군을 몰아내고 쿠웨이트를 해방시킨 것은 명백한 군사적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종류의 비극적 유산을 중동 땅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장기 주둔이었습니다.
이슬람교에서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두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사우디아라비아 영토에 비이슬람 교도인 미군 부대가 대규모로 주둔하게 된 것은 보수적인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겼습니다.
내가 당시 아랍권 보수파의 시각을 분석해 보면, 그들이 느낀 거부감은 단순한 군사 거점의 문제를 넘어섰습니다. "성스러운 땅이 이교도 군대의 군화 발에 짓밟혔다"는 종교적 불결함과 함께, "사우디 왕정이 외세에 안보를 구걸했다"는 자괴감이 팽배했습니다.
이 분노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사우디의 부호 출신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었습니다. 빈 라덴은 사우디 왕정이 미군의 주둔을 허용한 것을 강력히 비판하다가 국적을 박탈당했고, 이후 그의 테러 조직인 ‘알카에다(al-Qaeda)’를 통해 미국을 향한 피의 보복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불과 10년 뒤 발생할 9·11 테러의 결정적인 사상적·정치적 씨앗이 되었습니다.
4. 우리가 짚어봐야 할 역사의 이면과 제한적 승리
걸프전을 평가할 때 수많은 질문이 따라옵니다. "왜 미군은 당시 바그다드로 진격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고 중간에 전쟁을 끝냈을까?"
부시 행정부의 판단은 매우 냉철했습니다. 첫째, UN 안보리가 부여한 명확한 위임 권한은 '쿠웨이트의 해방'까지였지 이라크의 정권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둘째, 사담 후세인을 끌어내릴 경우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분출하며 나라가 완전히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이란의 영향력이 이라크로 확대될 것을 경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담 후세인은 권좌를 유지했고, 이후 이라크 민중(시아파, 쿠르드족)의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이라크에는 10년이 넘는 엄격한 UN 경제 제재가 가해져 무고한 이라크 민간인과 어린이들이 의약품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5. 현대 중동 세력 구도에 남긴 영향
1991년 걸프전은 중동에서 소위 '미국의 일극 체제'를 구축한 사건이었습니다.
냉전이 끝나가던 시점에서 소련은 이라크를 도울 여력이 없었고, 미국은 중동 내 독보적인 안보 보증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표면적인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서방의 개입은 역설적으로 지역 내 반미 정서를 극대화하고 비국가 무장 세력(알카에다 등)의 테러주의를 키우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국가 간 정규전의 시대가 저물고, 외세의 주둔에 반발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세력과의 '비대칭 전쟁'이라는 새로운 잔혹한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 3줄 핵심 요약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은 미국 주도 35개국 다국적군의 압도적 군사력으로 이라크를 격퇴하며 끝났습니다.
이 전쟁은 첨단 유도 무기와 스텔스 기술이 동원된 현대 하이테크전의 시작이었으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완전히 청산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지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이 장기 주둔하게 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거센 반발을 샀고, 이는 훗날 9·11 테러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 다음 편 예고
다음 11편에서는 21세기 중동 구도를 또 한 번 뒤흔든 비극, ‘9·11 테러와 이라크 침공(2003): 권력의 공백과 정세 불안의 가속화’를 다룹니다. 대량살상무기(WMD)를 명목으로 단행된 미군의 이라크 재침공과 그 이후 몰아친 무정부적 내전의 전말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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